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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의 행복을 안겨준 품/함경북도 일본인녀성의 수기

(평양 11월 7일발 조선중앙통신)나는 주체48(1959)년 12월 귀국하는 남편을 따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와서 최령순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사는 일본인녀성 야마나가 스쯔꼬이다.지금 나는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의 광폭정치,인덕정치의 따사로운품속에서 인생에 더없는 최상의 행복을 누리며 살고있다.나는 일본 미에현 마쯔사까시에서 태여나 부유하지는 못해도 남부럽지 않게 먹고 입으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농림성 통계국에서 사무일을 보았다.처녀시절 나는 일본 지바공업대학을 졸업하고 지바현 동경대학 생산기술연구소 연구원이였던 리지적인 조선청년 최현태를 사랑하였으며 민족을 초월하여 그와 결혼하였다.우리 부부사이에 어느덧 아들이 태여나 재롱을 부리고 남편이 연구소에서 촉망되는 인물로 지목되자 나는 그것만으로도 생활에서 더없는 만족을 느끼였다.그러던 어느날 나는 뜻밖의 소식에 접하였다.남편이 조선으로 귀국한다는것이였다.나는 자본주의사회로부터 사회주의사회에로 인생전환의 갈림길에서 우리들에게 소박하게나마 차례진 이 행복이 혹시 불행으로 뒤바뀌지 않겠는가 하는 불안으로 하여 도저히 마음을 진정할수 없었다.일본반동들이 한사코 반대하고 부모형제들도 달가와하지않았다.그러나 한번 마음을 두면 뗄수 없는것이 녀성들의 정이여서첫 사랑을 고백한 그와 헤여져서는 살것같지 못했다.그리하여 나는제1차로 니이가다를 떠나는 귀국선에 몸을 싣고 부모형제들과 헤여져 혈혈단신으로 장벽을 모르는 애정의 길을 따라 여기 조선으로 오게 되였다.처음에 나는 일본의 식민지통치로 고통을 겪은 조선사람들이 일본인인 나를 어떻게 대해주겠는가 하는 위구심도 생기였다.허나 이러한 근심은 며칠도 가지 못하였다.함경북도 청진시에 려장을 푼 우리에게 당시 김책제철소당위원회 위원장은 자기집을 내주었으며 남편에게는 과학연구기관에서 일할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주었다.이웃들은조선말을 모르는 나를 위해 각별히 왼심을 쓰며 생활에 불편이 있을세라 혈육처럼 도와주었다.단란한 새 생활속에 둘째아들이 태여났으며 그후 사회와 집단의 방조속에 나는 제철소에서 부기일을 하였다.남편은 1961년 5월 제철소에 찾아오신 위대한 김일성주석으로부터 직접 나라의 야금공업발전과 관련한 강령적가르치심을 받아안는 영광을 지니였다.또한 조국의 품속에서 근 40년간 주체적인 제철법을 연구완성하는데 크게 이바지한것으로 하여 로력영웅칭호와 박사학위를 수여받았으며 제8기,제9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거되여 사업하였다.그리고 주석의 탄생 70돐,조선로동당창건 50돐,조선지식인대회,전국영웅대회를 비롯한 국가적인 큰 경축행사들과 대회에 대표로 참가하여 7차례에 걸쳐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을 모시고 기념촬영을 하였다.자식들은 모두 대학을졸업하고 금속기계공업성과 김책제철련합기업소에서 나라를 위해 한몫을 하는 일군으로 떠받들리우고있다.나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은정과 배려속에 1998년 제2차 재조일본인녀성고향방문단 성원으로 일본에 갔다왔다.나는 방문을 마치고돌아와 경애하는 장군님께 우리 가정의 마음까지 합쳐 삼가 감사편지를 올리였다.그이께서는 한 평범한 일본인녀성인 나의 편지를 보아주시고 친필서한을 보내주시였다.참으로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은 우리 가정에 모든 행운을 안겨주고 꽃피워주신 어버이이시며 이 세상에 장군님을 모시고사는 조선인민처럼 행복한 인민은 없다.(끝)

Image credit: https://www.flickr.com/photos/kevinschoenmakersnl/5537149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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