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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유괴되여갔던 재조일본인녀성이 기자회견

(평양 4월 28일발 조선중앙통신)일본에 유괴되여갔던 재조일본인 안필화녀성이 28일 평양고려호텔에서 기자들과 회견하였다.

기자회견에는 평양시안의 신문,통신,방송기자들과 외국특파기자들,우리 나라 주재 여러 나라 대사관 출판관계일군들이 참가하였다.
기자회견에서는 먼저 안필화녀성이 발언하였다.
그는 1938년 11월 일본 도꾜도 가쯔시까구에서 출생하여 1959년 12월 조선인남편을 따라 공화국에 와서 43년간 살았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일본우익반동들의 조종을 받는 자들의 꼬임수에 넘어 일본으로 유괴랍치되여가 반공화국모략선전에 리용당하였다.
그자들이 《인도주의문제》를 걸고 나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면서 일본정부에 보냈다는 《청원서》요 뭐요하는것은 다 나의 의사를 무시하고 나를 반공화국선전에 악용하려는 기도로부터 출발한것으로서 도저히 참을수도 용서할수도 없는 반공화국모략행위이며 나에 대한 인권유린행위이다.
나는 2002년 12월초 아들집에 갔다가 딸의 집에 오던도중 낯모를 남자가 일본에 있는 녀동생이 가까운 곳에 와서 기다리고있는데 만나보지 않겠는가고 하기에 동생을 보고싶은 한가지 생각으로 그에게 속히워 유괴당하였다.
중국의 대련에서 일본기자들,령사관 관계자들,조선말을 아는 반공모략단체 관계자들은 나를 반공화국선전용 《취재대상》,《흥정물》로 취급하고는 일본으로 데려갔다.
일본에 있는 동안 나는 어느 하루도 공화국을 잊은적이 없으며 그리운 자식들과 화목하게 지내던 이웃들이 보고싶었다.
보고싶었던 동생들과 동창생들을 만나 기뻤지만 공화국에 대한 터무니없는 비방중상이 벌어지고있는것을 보면서 날이 갈수록 일본반동들에 대한 환멸과 저주감을 가지게 되였다.
손자,손녀들이 못견디게 그리웠고 풍족하게는 살지 못했지만 공화국에서의 생활이 그리워 눈물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래서 동생의 이름으로 아들에게 편지를 하였는데 뜻밖에도 자기들은 아무런 차별도 없이 살고있으며 더구나 손자,손녀들이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던 대학에 다닌다는 회답을 받고 참으로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 펼치시는 공화국의 정치야말로 인민적인 정치이라는것을 확신하였다.
또한 이를 통하여 위대한 장군님의 인덕정치,광폭정치의 고마움을 다시금 깊이 느끼였다.
태를 묻었다고 하여 고향이 아니라 정이 들면 고향이라고 43년간을 살아온 공화국이 진정한 나의 고향이다.
그래서 나는 공화국공민으로서 내 집이 있고 자식들이 기다리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품으로 돌아가리라 결심하고 중국에 나온 기회에 우리 대사관에 찾아가 귀국의사를 밝히였다.
안필화녀성은 이어 기자들의 질문에 대답하였다.
로동신문사 기자; 일본으로 가게 된 경위를 보면 유괴랍치되였다고 할수 있는데 그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었으면 한다.
대답; 2002년 12월 9일 량강도 대홍단군에서 아들과 헤여진후 나는 무산으로 가는 차를 기다리고있었다.
그때 한 남자가 자기와 함께 가면 차를 탈수 있다고 하여 그를 따라 갔는데 그는 지금 동생이 중국에 와있으니 잠간가서 만나보지않겠는가 하면서 무작정 나를 등에 업고 두만강을 건넜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나를 인계하였고 나는 그자들에 의하여 연길에서 20일가량, 룡정에서 며칠간 머물렀다.
이 과정에 나는 나쁜 놈들에게 속히웠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룡정에서 연길로 다시 대련으로 가는 과정에 내가 계속 동생을 찾자 그들은 구실을 대면서 장소를 옮기였다.
대련에 갔을 때 거기에는 이미 나의 호적등본까지 가지고온 일본주간잡지 《슈깡신쪼》기자와 《인도주의사업》을 한다는 사람들 여러명이 대기하고있었다.
나를 유괴하여 끌고다니던 자들은 일본반동들의 조종하에 움직이는 자들이였다.
이자들은 일본외상에게 보내는 《청원서》를 나에게 주면서 회유와 기만을 하였으며 나를 여러곳으로 끌고다니다가 심양주재 일본총령사관에 넘겨 일본으로 보냈다.
조선중앙통신사 기자; 일본에 있는 기간 느낀 생활체험에 대해 말해주기 바란다.
대답; 나는 2003년 2월부터 10월까지 일본공안경찰이 관리운영하는 건물에 혼자 있었는데 옆방에서는 3~4명의 경찰들이 매일 교대로 주야간 나를 감시하였다.
나는 그해 10월부터 세방에서 생활하면서 살아가기가 너무 어려워 경마장에 나가 청소일을 하였다.
보통 일본에서는 조선에서 온 사람들이라면 무턱대고 차별하면서 일자리도 잘 주지 않고 로임도 일본사람들보다 적게 준다.
때문에 공화국에서 변절도주한 자들은 일본의 반공화국단체들에 외곡,날조된 자료들을 제공하면서 살아가고있다.
일본에서 떠들고있는 《랍치문제》는 이미 다 해결된것인데 일본이 이 문제를 다시 들고나오면서 공화국에 대한 반감을 가지게 하는것을 보면 우리 재조일본인들도 수치감을 느끼게 된다.
일본사람들도 《랍치문제》를 가지고 너무나 엉터리없이 떠들고있기때문에 어느것이 진짜이고 가짜인지 분간할수 없다고 말하고있다.
일본의 반공화국모략단체들은 언론기관들에 공화국에 대한 날조된 자료를 제공해주어 허위보도를 계속하여 일반국민들이 그것을 믿도록 하기 위해 책동하고있다.
민주조선사 기자; 조국의 품,경애하는 장군님의 품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 경위에 대하여 설명해주었으면 한다.
대답; 나의 고향은 일본이다.
일본에 가있는동안 부모들의 묘를 찾아보았지만 너무도 많은 돈이 드는것으로 하여 묘지조차 없었다.
날이 갈수록 내가 나서 자란 곳이지만 정도 붙지 않고 남의 나라땅에 온것 같은데다 인정도 도덕도 없는 일본사회에 대한 환멸만 커갔다.
이와함께 두고온 가족들,서로 돕고 이끌어주던 이웃들이 사는 공화국이 못견디게 그리워졌다.
특히 나의 자식들을 아무런 차별도 없이 국가에서 보살펴주고 손자,손녀들이 대학에서 마음껏 배우도록 해주고있다는 소식을 들은 후부터는 잠도 오지 않고 밥도 제대로 먹을수 없었다.
사람이 잘 먹고 잘 입고 편안하게 산다고 하여 그것이 행복의 전부가 아니며 정들면 고향이라는 말의 참뜻을 이번에 뼈저리게 느끼게 되였다.
좀 못먹고 못입어도 자기 가족들이 있고 서로 돕고 화목하게 사는 사회,진정한 삶이 보장되는 땅이 조국이라는것을 나는 이번에 생활의 진리로 체험하였다.
조선에서 생활한 43년간의 나날은 나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하고 마음 편한 나날이였다.
나는 정든 사람들과 헤여져 혼자 사는것은 죽은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하고 조국의 품에 다시 안기기 위하여 적극 노력하였다.
나의 손자,손녀들이 행복하게 생활하고 공부하고있는것은 위대한 장군님의 인덕정치,광폭정치를 떠나서는 도저히 상상조차 할수 없다.
《평양타임스》기자; 경애하는 장군님의 품에 안기여 자식들을 만났는데 조국에 돌아온 소감에 대하여 말해주기 바란다.
대답; 일본에 있는 기간 외롭고 고독하게 살면서 조선에서 살던 나날들이 계속 떠오르고 자식들이 못견디게 그리웠다.
베이징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우리 비행기에 오르는 순간부터 꼭 꿈을 꾸는것만 같았다.
평양비행장에 내리니 만시름이 다 풀리고 이 땅을 다시 밟는다고 생각하니 그 감정은 이루 말할수 없었다.
어버이수령님의 동상을 높이 모신 만수대언덕에 오르면서 북받치는 격정을 누를길 없어 울고 또 울었다.
장한 일을 한것도 없는데 만나는 사람마다 반갑게 맞아주고 생활을 극진히 돌보아주는데서 진정한 인정미를 느꼈다.
안필화녀성은 자기 가족에게 크나큰 사랑을 베풀어주시는 경애하는 장군님에 대한 다함없는 감사의 정을 표시하면서 《김정일장군님 만세!》를 목청껏 불렀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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