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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동신문 《악독한 강제로동범죄의 책임에서 벗어날수 없다》

(평양 5월 7일발 조선중앙통신)7일부 《로동신문》은 《일본의 100년죄악을 총결산할것이다》라는 고정표제아래 《악독한 강제로동범죄의 책임에서 벗어날수 없다》는 제목의 개인필명의 글을 실었다.

글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지난 4월 5일 일본문부과학성은 국내외의 반대와 항의에도 불구하고 극우익반동단체인 《새 력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 외곡서술한 새 력사교과서를 검정통과시켰다. 이 교과서에서는 우리 나라에 대한 일제의 군사적침략과 식민지통치가 미화분식되였으며 일본군《위안부》문제는 완전히 삭제되였다. 더우기 일제의 조선인학살만행과 강제련행,랍치 및 중세기적인 강제로동범죄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일본반동들의 력사외곡은 진실을 가리우고 과거 일제가 저지른 범죄행위를 무마시키려는 비렬한 행위이다. 하지만 력사는 가리울수도 지워버릴수도 없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우리는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우리 나라를 침략한 력사를 잊지 않고있습니다.》
지난 20세기 전반기 일제가 우리 나라에 대한 군사적강점통치시기에 감행한 강제로동범죄는 그 기간과 규모,형태와 방법에 있어서 류례없는것으로서 우리 인민의 가슴속에 깊은 상처를 남기였다.
1894년 청일전쟁을 도발한 때로부터 시작된 일제의 조선인강제로동죄악은 침략전쟁의 확대와 함께 더욱 로골적으로 감행되였다.
당시 일제에 의한 침략전쟁의 계단식확대는 막대한 인적 및 물적자원의 소모를 초래하였으며 이것은 일본으로 하여금 로동력이 고갈상태에 빠지게 만들었다. 이러한 현상은 제2차 세계대전시기에 더욱 심하게 나타났다.
방도를 모색하던 일제는 급속히 확장되는 군수산업을 위해 부족되는 로동력의 원천을 조선사람들에 대한 대대적인 강제징발과 가혹한 노예로동에서 찾고 《국가총동원법》,《국민징용령》,《개정국민징용령》,《장년전원에 대한 징용령》,《녀자정신대근로령》 등 각종 악법들을 조작하여 수많은 조선사람들을 《징용》이라는 간판밑에 죽음의 고역장으로 끌어갔다. 일제의 《징용》대상에는 직업이나 나이,성별같은것이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그야말로 조선사람모두가 그 대상으로 되였다.
악착한 일제는 조선사람들을 《징용》으로 끌어가기 위해 강제련행,랍치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일제가 《징용》대상자들을 강제적인 방법으로 모집하였다는것은 그 호송과정을 통해서도 잘 알수 있다.
이에 대해 1944년 하리마조선소에 끌려가 강제로동을 강요당한 피해자 박용수는 《일제는 우리들을 화물자동차에 태워 개천역까지 끌고가 그곳에서 기차에 태워보냈다. 기차칸에서 밥곽 1개가 겨우 차례졌는데 그것마저도 2명이 나누어먹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때 우리를 호송한 사람은 일본인이였다. 부산에서는 일본에서 온 5?6명의 민간업자들이 우리를 기다리고있었는데 우리가 도착하니 호송원이 그들에게 우리들을 인계하는것이였다. 우리들을 일본에 보내기 위해 관부련락선에 태웠는데 나는 그때 배안에서 구명대를 베고 잤다고 하여 호송원한테서 되게 얻어맞았다.》고 증언하였다. 그의 말대로 일제가 조선사람들을 강제로동판으로 끌어가는 과정은 그야말로 죄인을 호송하는 과정을 방불케 하였다.
일제는 저들의 강제징발의 범죄적성격을 감추기 위해 《징용》으로 끌려온 조선사람들을 가리켜 《응징사》(징용에 응한 사람이라는 뜻)라고 불렀지만 그것은 눈감고 아웅하는 식의 교활한 책동이였다.
일본도서 《아이오이시력사》에는 《징용이 강제련행형식의 성격을 띠고있었기때문에 조선인 응징사 들속에서 도망치는 사람들이 계속 나타났다.》고 기록되여있다. 이것은 《징용》이 강제련행,랍치의 방법으로 진행되였다는것을 명백히 실증해주고있다.
이렇게 강제련행,랍치된 조선사람들은 조선국내 각지와 일본렬도,남양군도,필리핀 등 일제의 침략의 발길이 닿는 그 어디에나 끌려가 중세기적인 노예로동을 강요당하였다.
일제가 극히 축소하여 발표한 자료에 의하더라도 수백만명의 조선사람들이 강제징발되여 혹독한 무보수강제로동에 내몰렸다.
일제의 조선인강제로동범죄는 그 방법에 있어서도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것이였다.
일제는 강제로동에 끌려간 조선사람들에게 일본군대와 같은 규률을 강요하였으며 조금이라도 비위에 거슬리게 행동하는 사람들에게는 뺨후려갈기기,야구방망이로 치기,각목을 끼우고 꿇어앉히기,바께쯔를 든채 오래동안 서있기 등의 벌칙들을 적용하였다.
일제는 초보적인 로동조건조차 마련해주지 않고 장시간의 가혹한 로동과 로동강도로 조선사람들을 마소와 같이 혹사하였다.
하리마조선소에서 노예적강제로동을 강요당한 피해자 박용수가 《작업시간은 대체로 아침 8시부터 밤 8시까지였는데 자주 밤 10?11시까지 야간작업에도 내몰리웠다. 야간작업을 한 다음날에도 아침일찍부터 일하지 않으면 안되였다.》고 증언한것이 그 단적실례이다.
당시 일제는 하리마조선소에 끌려온 조선사람들에게 더 많은 일을 시킬 목적으로 점심밥을 현장에서 먹게 하였는데 그것마저도 한줌도 못되는 콩또래밥 혹은 작은 감자 5알정도와 싱거운 소금국이 전부였다고 한다.
이러한 실태는 하리마조선소에서만이 아니였다. 조선사람들은 로동보호시설이 전혀없는 군사시설물공사장이나 탄광,광산,언제건설장,철도공사장 등 가장 위험하고 고된 부문에서 하루 14?16시간,지어 20시간씩이나 고역을 당하였다.
강제로동으로 고역을 당하는 조선사람들의 참혹한 모습을 목격한 일본사람 쇼지 노베는 이에 대해 《조선사람들은 노예들이였다. 그에 비하면 죄인은 도리여 편안하였다. 밀차를 두명이 미는데 뒤에는 몽둥이를 든 감독이 따라와서 뛰지 않으면 매질을 했다.
나는 말을 가지고있었는데 그 말도 그렇게까지는 부리지 않았다.》고 증언하였다.
일제의 이전 동부군 첩보사관이였던 한 일본인은 극비밀리에 건설을 진행하던 마쯔시로대본영 지하방공호에서 1945년 4월부터 패전할 때까지의 사이에 강제련행된 약 2,000명의 조선사람들이 쇠사슬에 련결된채 가혹한 강제로동을 강요당하다가 그중 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하였다고 고백하였다.
일본에서 발견된 1944-1945년 당시의 자료에도 일본전국에 있었던 549개 소의 군사시설물공사장들에서 강제로 끌려온 조선사람들이 노예로동을 강요당하였다고 기록되여있다.
악착한 일제는 중세기적인 노예로동강요로 조선사람들의 고혈을 짜내면서도 로동력재생에 필요한 보수조차 주지 않았다. 주린 창자를 그러안고 하루 14?16시간의 고역을 치르는 조선사람들에게 있어서 강제로동현장은 그야말로 피눈물의 고역장,죽음의 함정이였다.
일제의 악독한 조선인강제로동범죄행위는 공장이나 건설장뿐아니라 농업부문에서도 감행되였다. 일본국내의 부족되는 식량을 해결할 목적밑에 일제는 《징용》,《징병》의 명목으로 수많은 조선청년들을 일본에 끌어다가 《자활대》,《농경근무대》 등에 배속시켜놓고 경작지개간을 비롯한 고된 농사일에 내몰아 마소처럼 부려먹었다.
우에서 언급된 일제의 조선인강제로동범죄행위는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일제에 의한 조선인강제로동은 국제법에 위반되는 중대한 인권침해범죄로서 절대로 합리화될수 없고 덮어버릴수도 없다. 우리 인민은 오늘도 일제의 악착한 조선인강제로동범죄에 대해 잊지 않고있다. 일본정부는 과거 특대형조선인강제로동죄악에 대한 국가적책임을 지고 응당한 보상을 하여야 한다.(끝)

Image credit: https://www.flickr.com/photos/lawrenceyeah/157058087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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