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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력사학학회 비망록 미일공모결탁에 의한 조선침략사를 해부

(평양 7월 28일발 조선중앙통신)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력사학학회는 28일 비망록 《조선민족의 백년숙적 미일침략자들의 범죄적공모결탁에 의한 조선침략의 력사를 해부한다》를 발표하였다.

비망록은 다음과 같다.
7월 29일은 범죄적인 《타프트-가쯔라협정》이 조작된지 100년이 되는 날이다.
19세기 중엽부터 우리 나라를 침략하기 위하여 서로 공모결탁하여 온 미제와 일제는 범죄적인 《타프트-가쯔라협정》을 통하여 미국이 조선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화를 공식적으로 인정해줌으로써 미일결탁관계는 새로운 단계에 들어섰고 일본은 미국의 비호밑에 《을사5조약》을 날조하여 조선을 군사적으로 강점할수 있었다.
이 범죄적공모결탁관계는 새로운 양상을 띠면서 일제의 식민지통치시기를 거쳐 오늘까지 계속되고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력사학학회는 우리 민족과 세계의 량심이 미일공모결탁에 의한 조선침략의 력사를 해부하고 반미반일투쟁의 봉화를 더욱 높이 추켜드는데 도움을 주기 위하여 이 비망록을 발표한다.
1.《타프트-가쯔라협정》의 조작
아메리카원주민의 피바다우에 솟아난 미국은 《서진정책》의 연장선에서 해외침략의 방향타를 아시아태평양으로 지향시키고 1845년에는 《조선개방안》을 내놓았으며 그 첫걸음을 《셔먼》호의 침략으로부터 개시하였다.
그러나 우리 인민의 용감한 반침략투쟁에 의해 침략선《셔먼》호가 대동강에 수장되고 1871년 로제쓰의 조선원정함대까지 참패를 당하게 되자 미제는 단독침략계획을 포기하고 《동맹자》를 찾게 되였으며 결국 그 적임자로 일본을 택하였다.
한편 일본은 《명치유신》이후 《정한론》의 물결을 타고 봉건조선의 문호를 선참으로 개방하며 나아가서 전 조선을 지배하려고 책동하였으나 영국, 프랑스, 로씨야 등 유럽렬강들과의 쟁탈전에 부딪쳐 강한 《동맹자》를 모색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미제는 바로 일본의 지리적조건과 봉건조선왕조와의 오랜 교린관계, 특히 사무라이적호전성과 《일미화친조약》에 의한 종속관계 등에 주목하고 일본을 저들의 길잡이로 리용하려 했으며 일제 역시 큰 세력을 등에 업고 어부지리를 얻으려는 교활한 타산을 하게 되였다. 결국 미국과 일본은 조선침략에서 서로 공모하고 결탁하는 길로 나가게 되였으며 그 도수를 높여나갔다.
조선침략의 시작부터 실패를 거듭한 미제는 조선의 내정과 지리에 익숙한 일본을 척후병으로 내세워 조선침략의 길을 닦게 한 다음 하수인의 도움을 받아 저들의 침략적발판을 마련하려고 하였다.
미국은 우선 일본의 외교법률고문으로 있던 미국인 리젠드르를 내세워 일본을 조선침략에로 부추기는 외교정책을 작성,권고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리젠드르는 일본 외무경 소에지마에게 《일본은 조선과 만주를 병합하여야 한다》, 《속히 조선을 침략하고 료동을 제어하며 대만을 점령》하여야 《중국을 반달형으로 포위》할수 있고 아시아에서의 《지도력》을 가질수 있다고 《건의》하였다. 그의 《건의》는 해외팽창열에 들뜬 일본사무라이들에게 접수되여 조선침략안작성의 기초로 되였다.
또한 조선침략경험을 가진 중국주재 미국공사 로우는 《청일조약》비준 교환차로 중국에 온 소에지마와 조선침략안을 토의하면서 구체적인 조언을 주었으며 미국정부는 일본의 군사행동보장을 위해 2척의 배와 8,000만발의 탄환까지 원조하였다.
미국의 구체적인 지도와 원조는 일본군국주의자들을 로골적인 군사도발에로 떠밀었으며 마침내 1875년 9월 《운양》호사건을 일으키게 하였다.
다음 차례로 할 일은 《운양》호사건을 구실로 조선에 불평등조약을 강요하여 굳게 닫긴 봉건조선의 문호를 개방하는것이였다. 이때에도 일본의 계획을 선참으로 지지,추동한것은 미국이였다.
일본주재 미국공사 빙함은 침략계획을 알리려 온 일본 외무경 데라시마가 일본사절단이 조선에 가서 페리제독(일본을 문호개방시킨 미군제독)의 《포함외교》전술을 쓰려고 한다는데 대해 《그렇게만 하면 무방하다》고 지지해주면서 그 전술적방도까지 대주었다. 그리고 사절단이 출발할 때에는 테일러가 쓴 책 《페리의 일본원정소사》를 주면서 페리가 함대로 일본을 위협하여 불평등조약을 강요한 그 수법대로 할것을 다시금 강조하였다.(일본도서 《조선개국외교사》 282페지,438페지)
미국상전으로부터 구체적인 지도를 받은 일제는 《운양》호사건의 《책임》을 묻는다는 구실밑에 1876년 1월 15일 6척의 군함(그중 4척은 군함으로 위장한 수송선)을 강화도 앞바다에 침입시키고 《페리제독의 전술을 자신의것으로 만들어 … …놀랄만한 정도의 허풍과 소동을 피우면서 강화도에 비법상륙》하였으며 담판장에서도 위협과 사기적방법으로 저들의 요구를 강요하여 끝내 2월 27일에는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를 강압체결하였다.
미국의 적극적인 방조밑에 맨 처음으로 조선침략의 발판을 마련하게 된 일본은 그에 대한 《보상》으로 미국의 조선침략을 위하여 충실한 길잡이가 되여주었다. 《일본의 우의적알선에 의해》 얻어진 《수확》이 곧 1882년 5월 22일에 체결된 《조미조약》이였다.
《조미조약》체결로 미국은 최혜국대우와 령사재판권을 얻었고 조선에 대한 침략의 지반을 닦을수 있게 되였으며 우리 나라는 점차 유미렬강의 반식민지로 굴러떨어지게 되였다.
1894년 갑오농민군이 《척양척왜》의 구호를 높이 들고 반침략반봉건투쟁에 떨쳐나선데 질겁한 일제는 청나라의 출병을 구실로 6월에 1만명이나 되는 륙해군무력을 인천에 비법상륙시키고 농민전쟁을 야수적으로 탄압하였으며 《내정개혁》을 강요해나섰다.
이 파렴치한 침략행위를 선참으로 옹호고무해준것도 미국이였다. 미제는 일본의 조선출병이 거류민과 공사관《보호》를 위한 《전적으로 옳은 조치》라고 하면서 극구비호하였으며 조선주재 미국공사 씰은 일본의 《내정개혁》요구가 《조선사람을 계몽시키고 조선관리들을 즐겁게 해주며 … 독립국가로서의 지위를 강하게 하려는것》이라고 찬양하였다.(《미국외교문서》중일전쟁 26페지)
또한 일제가 청일전쟁을 도발하였을 때에는 《화평중재》를 표방하면서도 《베이징을 점령하지 않고서는 결코 진격을 멈추지 말라》고 하면서 일본을 전쟁확대에로 추동하였으며 로일전쟁시기에는 일본에 1억 5,000만US$의 차관과 7,670만US$의 전략물자를 보장해주었다. (일본도서 《일청전쟁실기》 18권 89페지,이전 쏘련도서 《로일전쟁시기 미국의 원동정책》 151페지)
하기에 일본의 한 신문은 《(일본의) 전쟁개시의 결의와 그 수행을 일본에 가능하게 만든것은 영국과 미국의 지지가 있었기때문》이라고 실토하였다.
미제가 이렇듯 두 전쟁에서 일본을 적극 지원해준 근본목적은 일본의 힘을 빌어 조선에서 가장 위험한 적수들을 내쫓고 자기 리권의 안전을 담보하며 일본을 《조선의 보호국》으로 되게 하려는데 있었다.
당시 미국대통령 루즈벨트는 미국주재 도이췰란드대사와 로일전쟁의 강화조건에 대하여 말하면서 《조선은 일본의 강점하에 들어가야 한다. … 일본사람들이 미국인의 리권을 존중해줄것을 미국은 유일한 희망으로 여긴다》고 하였으며 영국은 《영일동맹》의 기한을 연장하고 조선에서의 일본의 절대적인 권리와 리익을 인정한다고 규제할것을 권고하였다. 이 권고가 있은 이후 1905년 8월에 제2차 《영일동맹》이 이루어졌으며 이와 관련한 문건에서는 《조선에서의 일본의 지도, 감리 및 보호의 조치를 취할 권리》가 규제되였다.(이전 쏘련도서《로일전쟁시기 미국의 원동정책》 172페지,《조선관계조약집》 321페지)
그러나 일제는 조선을 지배할 《권리》에 대한 미국의 담보를 조약화할것을 희망하였으며 미국은 청일전쟁의 승리로 대만과 팽호렬도를 차지한 일본이 그에 린접한 자기의 식민지인 필리핀에 세력을 뻗치는것을 우려하였다.
《호상성의 원칙》에서 조약을 체결하여 식민지지배를 서로 인정할것을 희망하는 일본과 필리핀의 《안전》을 우려하면서 일본으로부터 그에 대한 《안전담보》를 확약받으려는 미국의 리해관계에서 공통점이 생겨났으며 이로부터 《타프트-가쯔라협정》이 조작되였다.
1905년 7월 일본에 기여든 미륙군장관 타프트는 29일 일본수상 가쯔라와 비밀회담을 진행한 끝에 비밀각서교환의 형식으로 《협정》을 체결하였다.
《협정》에서 일본은 《필리핀이 미국과 같은 강력하고 친선적인 나라의 지배》를 받아야 하며 《일본은 필리핀에 대하여 그 어떤 침략계획도 가지고있지 않음을 확언》하였고 미국은 《조선이 일본의 동의없이 외국과 어떠한 협정도 체결할수 없게 할 정도의 조선에 대한 일본의 종주권》을 인정하기로 하였다.
7월 31일 자기를 《친일파》로 자처하는 루즈벨트는 《타프트-가쯔라각서》를 보고 타프트에게 그것이 《모든 측면에서 전적으로 정확하다》고 하면서 《당신이 한 모든 말을 내가 비준한다》는것을 알림으로써 이 각서는 《법적효력》을 가지게 되였다.(《조선관계조약집》 319~320페지)
이렇게 되여 미제는 조선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종주권의 확립을 정식 시인하였고 그 대가로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에 대한 식민지지배를 인정하기로 확약하였다. 이것은 《타프트-가쯔라협정》이 극동에서의 제국주의적식민지분할에 관한 죄악의 문서이며 타국의 령토와 민족을 제멋대로 나누어가질것을 흥정한 미일제국주의자들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파렴치한 날강도들이라는것을 확증해주고있다.
2. 미국의 비호에 의한 일제의 조선강점과 식민지지배
미국으로부터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들수 있는 《담보》를 받게 된 일본은 그 즉시로 이 《협정》실현에 달라붙었다. 그것이 곧 《을사5조약》을 날조하여 조선을 식민지로 만드는것이였다.
1905년 9월 5일에 체결된 《포츠머스강화조약》을 통하여 조선봉건정부에 대한 《지도, 보호, 감리의 조치를 취하는데 로씨야가 방해 또는 간섭하지 않는다》는 담보를 받은 일제는 조선의 《보호국안》작성에 착수하였으며 9월 8일 외상 고무라는 미국무장관 루트를 찾아가 조선을《보호국》으로 만들 일본의 계획에 대한 미국정부의 의견을 물었다. 이때 루트는 《조선의 안녕과 동양의 평화를 위해서도 (그것은) 최상책으로 된다》고 하면서 《일본이 그것을 단행한다고 하여도 미국의 여론은 조금도 이에 반대하는 일이 없을것》이라고 하였다. 다음날 루즈벨트는 고무라에게 《장래의 화근을 완전히 없애기 위한 훌륭한 행동》이라고 하면서 《나를 충분히 믿어도 좋다》고 하였으며 조선이 《조약》체결에 응하지 않는 경우에도 일본의 일방적인 《선언》을 무조건 지지해주겠다고 약속하였다. 그후 루즈벨트는 《미국정부는 어떻든지간에 일본의 정책에 맞게 행동하겠다》고 확언하였다.(《일본외교문서》 38권 1책 521페지,530페지,《고무라외교사》 하 154~155페지)
그리하여 조선을 《보호국》화 할데 대해 미일 두 제국주의는 또다시 공모결탁하였다.
상전의 절대적인 지지에서 힘을 얻은 일본정부는 1905년 10월 27일 8개 조항으로 된 《조선보호권확립실행에 관한 각의결정》을 채택하였다.
이 《결정》에는 《보호조약안》의 작성,전권위임 및 칙사파견 등 일반적절차와 함께 조선주둔군 사령관의 참가와 군대의 서울 진입 및 주둔 등 군사적강권을 발동할데 대한 사항도 계획되여있었으며 지어 조선측이 조약체결을 거절하는 경우 《최후의 수단으로서 조선에 대하여 보호권을 확립하였다》는것을 일방적으로 공포할데 대한 방법까지 예정되여있었다.(《일본외교문서》 38권 1책 526~527페지)
《결정》은 조선의 《보호국》화를 기정사실로 하고있었으며 조약체결은 다만 형식으로 치부하였고 그것조차도 군사적강권발동을 필수적수단으로 규제하였다. 일본이 이렇듯 안하무인격의 폭행으로 조선을 식민지화하려고 한 배경에는 미국의 적극적인 지지와 각종 조약으로 이미 렬강들의 입에 자갈을 물려 놓았다는 현실적조건이 있었다.일본은 조약이 강압적으로 체결되건,국제법상의 요구조건을 구비하건 말건 그것은 전혀 고려에 두지 않았다.
《을사5조약》날조과정은 일제의 파렴치성과 악랄성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일본 《천황》의 특사로 파견된 이또는 고종황제에게 《조약초안》을 알려주면서 《본안은 …변동의 여지가 없는 확정안》이며 페하가 거부하면 《한층 불리하게 되는 결과를 각오》해야 한다고 위협해나섰으며 일본공사 하야시와 함께 나서서 리조정부의 대신들에게도 찬성할것을 강요하였다.
(《일본외교문서》 38권 1책 497페지,501~502페지) 11월 17일부터 무력으로 왕궁을 포위한 일제는 어전회의에서 일치하게 《조약》체결을 반대할것을 결정하고 나오는 대신들을 가두어놓고 《협의》를 강요하였으며 조선주둔군 사령관 하세가와와 헌병대장 사또를 거느린 이또는 8명의 대신들을 한사람씩 지명,심문한후 《다수로 가결》되였다고 선포하고 고종에게 조인을 강요했다.(《고종실록》 권46 광무 9년 12월 16일) 고종이 이미 이에 대하여 《협상단계인데 번거롭게 굴지 말라》고 대답함으로써 명백히 조인을 거부하였으나 이또는 훔쳐온 조선봉건정부 외부의 도장을 찍고 《조인》되였다고 선언하였다. 이것은 실로 력사에 전무후무한 날강도행위였다.
세칭 《을사보호조약》이라고 하는 《조약》을 이렇게 날조한 일제는 국가수반의 재가,비준도 없이 1906년 2월 1일 서울에 《통감부》를 설치하였다.
《을사5조약》의 조작을 도와준 미제는 그것을 반대하는 우리 인민의 항쟁을 외면하고 조선에 대한 일제의 식민지통치를 적극 비호두둔하였다.
미국무장관 루트는 고종이 유미렬강 특히는 미국에 환상을 가지고 1905년 11월 26일 미국인 헐버트(잡지 《코리아 레뷰》 주필)를 통하여 미국정부에 《조약》을 페기시키는데 협력해줄것을 요청하자 12월 12일 《미국정부는 이 문제에 개입하지 않는다》고 거절하였으며 프랑스주재 조선공사 민영찬의 요청도 같은 리유로 묵살하였을뿐아니라 즉시 미국주재 일본공사 다까다이라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기까지 하는 망동을 부리였다.
미국정부의 이런 행동은 체약일방이 다른 나라의 억압적인 행동을 받게 되였을 때 다른 일방에 통지하면 《원만한 타결을 가져오도록 주선을 다함으로써 우의를 표시할것》이라고 규제한 《조미조약》 제1조에 대한 위반이며 파렴치한 배신이였다.
지어 11월 24일에는 서울주재 미국공사 모르간에게 조선의 외교권이 일본에 넘어갔으니 공사관을 즉시 철수할것을 지시하였다.미제는 《일본의 정책에 맞추어》 유미렬강들가운데서 제일먼저 자기 공사관을 철수시켰다.
《헤그밀사사건》을 구실로 1907년 7월 일제가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24일에는 《정미7조약》을 강요하여 조선의 내정권마저 완전히 빼앗아냈을 때에도 미제는 흑백을 전도하여 《헤그밀사사건》은 조선국왕의 《정치적자살》행위이라고 비난하면서 일제의 《통감》통치를 《가장 큰 칭찬을 받을 만한것으로서 가장 만족스러운》정치이라고 비호하였으며 조선봉건정부의 외교고문인 미국인 스티븐스는 《리완용과 같은 충신이 있고 이또와 같은 통감이 있는것은 조선에 있어서 큰 행복이며 또한 동양의 큰 행복이다…(조선은) 백성이 우매하여 독립할 자격이 없다》고 뇌까렸다.(일본도서《조선자료》 제2호 144페지,《대한매일신보》 1908년 4월 17일)
이런 모독적인 폭언으로 하여 그는 우리 나라 애국청년들인 전명운,장인환에 의해 처단되였다.
미국정부는 1907년 9월에 또다시 타프트를 《친선의 사절》로 일본에 파견하여 일본수상 사이온지와 밀담을 벌리게 하고 조선을 최종적으로 《처리》할데 대한 협의를 진행하게 하였다. 여기서 공모자들은 《선행자들(타프트,가쯔라)에 의하여 표명된 의견을 확고하게 시인》하고 조선문제를 종국적으로 《처리》하는데서 《견해의 일치》를 보았으며 타프트는 앞으로도 미국이 《일본의 벗으로 언제나 남아있을것》임을 언명하였다.
이로써 미제는 조선을 필리핀과 같은 완전한 식민지로 전환시키려는 일제의 《합병》정책에 확고한 지지를 주었다.(《일본외교문서》 40권 1책 555~556페지)
미국의 후원을 받은 일제는 즉시 강제《합병조약》초안을 만들어 1910년 8월 22일 리완용친일괴뢰정부로 하여금 망국적인 조선일본《합병조약》에 도장을 찍게 하였다. 《을사5조약》에 의하여 모든 외교권을 일본에 빼앗긴 조선봉건정부가 조선의 외교권을 독점한 일제의《통감부》와 《조약》을 맺는다는 그 자체가 벌써 이 《조약》의 불법,무효성을 규제한것이였지만 철면피한 일제는 눈섭 하나 까딱하지 않고 8월 29일 《조선을 일본제국에 완전히 병합》한다는것을 내외에 공포하였다.
일제의 조선《합병》을 쌍수를 들어 환영한것은 미국이였다.
미국무성은 미국주재 일본대사 우찌다로부터 《합방》관계서류를 받았을 때 만족을 표시하면서 《조선의 합병에 대해서는 각국이 모두 이의가 없을것이다》고 하였으며 루즈벨트는 후에 《합병이 공정한 처사》인듯이 말했다. 미국출판물들도 일제히 그것이 《조선사람의 행복을 증진》시킬것이며 《일본의 이민과 필리핀군도에 대한 일본의 주의를 아시아대륙에 돌리게 하는것이기때문에 미국을 위해서는 이를 환영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떠들었다.(일본도서 《조선자료》 제2호 473페지)
미제는 숭미적인 우리 나라 민족주의자들의 개량주의적인 《독립청원》조차도 일축해버리면서 일제의 식민지통치를 지지해주었다.
미국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론》에 환상을 가진 민족주의자들이 청원의 방법으로 독립을 이룩해보려고 뛰여다니면서 미국의 후원을 요망했으나 미국무장관대리 프랭크 호크는 《조선은 일본의 일부이다》,《윌슨의 선언은 일본제국 령토안에서는 적용되지 않》으며 《조선을 옛 상태로 되돌아가게 하려는 제안은 단연 불가능》하다고 하였다.1920년 8월 조선에 기여든 미국 《동양시찰단》은 《독립원조》의 희망을 안고 환영하는 국내 부르죠아민족주의자들에게 독립운동보다도 《학습과 공업 등 모든 일에 힘을 다하여 정의와 인도로써 분투하기를 바란다》는 말을 남기고 뺑소니를 쳤다.(일본도서 《조선독립운동소요사론》 331페지,《동아일보》 1920년 9월 3일)
미일공모결탁의 범죄적성격은 3.1인민봉기에 대한 미국의 적대적인 태도와 평화적시위군중을 야수적으로 학살한 일제를 비호해준데서도 표현되였다.
당시 국제여론은 평화적시위군중에 대한 일제군경들의 야수적탄압만행을 비난하면서 《세계에서 가장 혹독한 압제를 받는 조선인》에 대한 동정의 목소리를 높이였지만 유독 미국만은 반일투쟁이 무모한것이며 《웃음거리》로 된다고 모독하면서 조선인민이 일본의 《통치》를 감수하는 길만이 참된 《행복》과 《자유》를 누리는 길이며 《동양의 평화》에 리로운것이라고 떠들었다.
미국무성은 《이 문제는 순전한 (일본의) 내정문제이며… 소요진압을 위하여 일본정부가 취한 방법에 관한 여러가지 (아름답지 못한) 보도들이 있는데 극히 의심스러운 점이 있다.…일본이 특히 가혹하고 잔인한 조치를 취하였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이러한 과장된 보도는 오직 배일감정을 선동하기 위하여 류포한것으로서 …유감이다.》라는 성명을 발표하여 일제의 만행을 변호해주었다.(미국신문 《크리스챤 싸이언스 모니터》 1919년 4월 21일)
또한 교활한 국무성관리들은 학살만행의 책임을 직접적인 집행자들에게 넘겨씌우고 그것을 조선사람들에게 공포하며 세계에는 일본이 종래의 통치방식을 고친다고 발표하여 기만하라는 등 교형리들이 피신할 방법까지 가르쳐주었다.
이러한 범죄적공모결탁은 태평양전쟁을 개시한 그때까지 계속되였으며 제2차 세계대전기간에도 미국과 일본은 군사적적국이 되여 서로 싸우면서도 《정치적동맹자》로서 공모하였다.
그 근저에는 일본의 패전으로 생기게 될 아시아에서의 《힘의 진공상태》를 미리 막고 일본을 손아래동맹자의 지위에서 《반공돌격대》로 써먹으려는 미국의 타산과 미국을 등에 업고 《대동아공영권》의 망상을 실현해보려는 일본의 야심이 놓여있었다.
3. 분렬과 전쟁의 비극을 몰아온 공범자
제2차 세계대전후 미일공모결탁에 의한 조선침략책동은 일제의 패망을 계기로 한 미제의 38도선 조선분렬안조작과 미군의 남조선강점에서부터 시작되였다.
원래 일제의 조속한 항복을 받아 전 조선을 단독으로 강점하려고 꾀하였던 미제는 조선인민혁명군의 총공격과 이전 쏘련의 대일참전에 의해 그것을 실현할수 없게 되자 조선반도의 절반만이라도 차지해 보려고 획책하였다.
이에 대하여 맥아더의 전기작가였던 죤 간서는 《미국은 무엇인가 대책을 세워 쏘련군이 단숨에 조선반도를 남하하여 전 조선령토를 점령해버리지 않도록 하는것이 초미의 문제였다.우리로서는 반도의 그 어딘가에 한선을 긋지 않으면 안되였다.》고 썼다.(일본도서 《맥아더의 수수께끼》 277페지)
당시 미군은 조선에서 멀리 떨어진 오끼나와와 필리핀에서 서성거리면서 일본본토 상륙작전을 준비하고있던 중이였으므로 당장은 조선에 보낼 병력도 한척의 배도 마련할수 없었던것이다. (일본도서 《트루맨회고록》219페지)
트루맨은 8월 10일 국무,륙군,해군 3성조정위원회에서 일본항복수락에 관한 문제를 토의하고 《실제적인 해결책》을 토의하도록 하였으며 이에 따라 국방참모들은 그날 오후 4시까지 조선의 적당한 지역에 일본군의 항복분담선을 그을데 대한 지시를 받았다.
분담선을 긋기 위하여 모여든 륙군장교들은 딘 러스크(후의 국무장관)와 챨스 본스틸(후의 《유엔군사령관》) 등 대좌급의 인물들이였다.그들은 이때 일제가 로씨야와 함께 1896년 조선에 대한 세력권분할안으로 38도선을 제기하였던 사실과 특히 1945년 2월에 일본이 《본토작전에 관한 통수조직》을 재편성하면서 당시 조선강점 일본군의 총칭이였던 《조선군》을 해체하여 38도선 이북주둔군은 《관동군》에 배속시키고 그 이남주둔군은 《대본영직할야전군》이였던 제17방면군에 소속시켰던 사실에 기초하여 38도선에 줄을 긋고 그것을 일본군의 항복접수와 무장해제를 위한 쏘미간의 림시적인 《분담선》으로 설정하였다.
트루맨은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조선의 고도 서울에서 일본의 항복을 받을수 있게 된것》을 매우 흡족해 하면서 즉시 비준하였으며 그 안은 곧 《일반명령》 제1호로 문서화되여 13일 련합국들에 통지되고 15일에는 마닐라에 있는 맥아더에게 전달되여 9월 2일에 공포되였다.
이렇듯 38도선은 당초부터 쏘미량군이 일본군의 항복접수를 위해 그은 일시적인 군사적《분담선》에 불과하였다.후에 트루맨이 고백한것처럼 《38도선을 조선의 분할선으로 하는것은 한번도 국제회의의 토의에 오르지 않았던것》이였다.
그러나 교활한 미제는 그것을 저들의 세계제패전략을 위한 남조선영구강점과 식민지화에 리용함으로써 조선인민에게 분렬의 비극을 강요한 저주로운 분할선으로 고착시켰다.이처럼 력사적으로 일제의 조선침략과 관련되여 온 38도선을 미제가 조선의 분할선으로 고착시킴으로써 일제는 미제의 조선분렬정책을 직접적으로 도와준 공범자로 되였다.
일본은 미제의 남조선강점과 《군정》실시도 적극 도와나섰다.
미군이 남조선을 강점할 때 맥아더는 당시 《조선총독》이였던 아베에게 《특별명령》을 내려 그가 《남조선의 치안》을 책임지고 유지하도록 하였다.아베는 일제헌병과 경찰잔당들을 재무장시켜 남조선인민들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도록 하였으며 1945년 9월 8일에는 미군의 인천상륙을 인도하였고 남조선 각지에로의 진주를 직접 도와주었다.
이와 함께 일제는 남조선에 대한 미제의 식민지통치에 필요한 《경험과 자료》들을 고스란히 넘겨주고 적지 않은 《총독부》관리들을 《미군정청》에서 리용하도록 함으로써 미제의 《군정》통치에 큰 도움을 주었다.미제의 《군정》통치는 사실상 일제의 협력밑에서만 가능하였다.때문에 미국인들조차도 《북반부에 있어서 일본군과 점령군간의 공기는 적대적인것》이였지만 《남반부에서 일본은 점령군 당국에 대해서 거짓없는 협력적태도를 취하였다》고 말하였다.(일본도서 《오늘의 조선》 47페지)
일본은 미제의 조선침략전쟁에도 가담하고 그에 적극 협력하였다.
일본은 이전 일본군참모본부 차장이였던 가와베를 비롯하여 참모본부와 대본영륙군부 작전과에 있던 자들을 《KATO》,《력사연구협회》 등 비밀조직에 망라시켜 미제의 조선전쟁도발계획작성을 직접 도와주었으며 미제가 조선전쟁을 도발한 후에는 전쟁참가를 《정부방침》으로 규정하고 《유엔군을 협력한다》는 구실밑에 수많은 무력을 조선전선에 들이미는것과 함께 일본전령토를 미제침략군의 병참기지,보급기지,수리기지,출동기지로 제공하였다.
요시다반동정부는 미제의 지시에 따라 조선전쟁 첫 시기에 구일본군 장령들과 장교 200명을 조선전선에 파견한데 이어 4,000여명의 《황군》출신 장병들을 모집하여 일본에 있는 미군특수훈련소들에서 훈련시킨 다음 미제24사단과 미제1기병사단에 배속시켜 조선전선에 들이밀었다.
일본반동들은 수많은 군사인원을 《재일조선인부대》,《의용군》 등으로 가장시켜 조선전선에 파견하였으며 1951년 2월까지만해도 무려 14만명이상에 달하는 일본인을 징집하였다.(일본도서《현대조선의 력사》 266페지,일본도서 《현대조선론》 82페지,이전 쏘련도서 《일본에 있는 미제국주의》 49페지)
일본은 미제의 지령에 따라 지상군뿐아니라 공군과 해군,기술인원들도 조선전선에 수많이 파견하였다.
프랑스주간잡지 《악?》을 비롯한 서방출판물들은 《일본비행사들이 조선을 폭격》하고 일본으로부터 대량의 군수물자들이 전선에 수송되고있다고 보도하였으며 해상 《자위대》소속의 전함 46척이 1950년 10월 2일부터 12월 15일까지의 기간에 미해군과 함께 조선인민군 해군을 반대하는 작전에 참가한 사실,1950년 8월 미해군 극동사령부 부참모장 알레이 바크의 명령에 따라 쯔시마해협에 집결되여있던 1,500여명의 일본항로개척대와 70여척의 소해정들중의 일부로 무어진 4개 《특별소해대》들이 1950년 10월 2일부터 12월 12일까지의 기간에 인천,원산,군산,해주,남포 등 5개 해역에서 총 327㎞의 수로와 607mile²의 정박소에 대한 소해작업을 진행한 사실 등을 폭로하였다. (이전 쏘련도서 《일본에 있는 미제국주의》 49페지,일본도서 《현대 일본의 군사경제적잠재력》 113페지,일본도서 《일본의 소해》 94~95페지,일본도서 《일본방위정책과 현실》 113~114페지)
일본 소해정들이 미군의 인천,원산상륙작전들을 도와 소해작전에 참가했다는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조선전쟁시기 미제는 일본과 《군사시설 및 군사기지사용에 관한 협정》을 맺고 일본에 있는 1,300여개의 군사기지와 각종 군사시설,주택들을 미군전용으로 넘겨받았다. 전쟁도발후 100일동안에만도 조선전쟁에 병력과 군수물자를 수송하기 위하여 일본항구들을 출항한 선박은 수천척이나 되며 1950년 7월 한달동안에 부산항으로 수송한 물동량만도 30만 9,000t에 달하였다.
일본수산청 선박국이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1950년 7월부터 10월까지의 기간에 일본선박 248척이 동원되여 99만 5,800t의 미군수물자를 조선전선에 수송하였다.(일본도서 《륙전사집》 1권 159~160페지,남조선잡지 《말》1990년 6월호)
조선침략전쟁이 개시된후 일본공업은 전시체제로 개편되여 미군이 특수주문한 군수품들을 전적으로 생산보장하였다.
일본회사들이 1950년 6월부터 10월까지 미군에 생산공급한 군수물자의 총액은 1억 364만US$,1951년 6월에 이르러서는 그 액수가 3억 1,518만US$에 달하였다.(일본잡지 《경제평론》 1968년 10월호)
또한 일본의 공장들에서는 1952년 5월부터 1953년 6월까지의 기간에만도 약 2,000문의 각종 구경의 포,7,656문의 《바주카》형반땅크포,40만개의 로케트탄,120만발의 포탄,230만개의 각종 지뢰,220만개의 수류탄을 생산하여 미군에 공급하였다.(《로동신문》 1994년 6월 25일)
일제는 미제의 세균전에도 적극 공모협력하였다.
1951년 3월 《유엔군》사령부 공공복지부장 준장 삼스의 지휘밑에 거제도에서 조선인민군과 중국인민지원군 포로들을 대상으로 하여 감행된 세균무기실험준비에 일본의 세균전범자들이 참가하였으며 같은 해 12월에는 이시이 시로와 기다노 마사지 등 일본세균전범자들이 또다시 남조선에 기여들어 미제의 세균전에 참가하여 페스트,콜레라 등 악성전염병을 만연시킴으로써 수만명의 평화적주민들을 살해하였다. (일본도서 《현대조선의 력사》 216페지,《따쓰통신》 1951년 12월 12일)
결국 일본은 미제의 침략전쟁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전범국으로,우리 민족앞에 또다시 용납못할 범죄를 저지른 불구대천의 원쑤로 락인되였다.
4.재침과 고립압살책동의 위험한 공모자
조선전쟁에서 일본이 논 《반공돌격대》로서의 역할을 중시하게 된 미제는 일본군국주의자들과 남조선반동들을 결탁시켜 남조선과 일본관계를 저들의 극동정책실현에 리롭게 편성하며 나아가서 미,일,남조선 3각군사동맹을 형성할 흉심을 품게 되였다.이로부터 미제는 전쟁이 한창 진행되고있던 1951년 10월에 남조선과 일본사이에 예비《회담》을 가지도록 사촉하였으며 1952년 2월에는 끝내 《본회담》(1차)이 성사되도록 압력을 가하였다.
일본군국주의자들은 이 기회를 재침의 꿈을 실현할 절호의 계기로 간주하고 《회담》을 저들의 리익에 맞게 유도하기 위하여 《명치유신의 젊은 전사》로 자처하면서 온갖 교만하고 파렴치한 책동을 다하였다.
그들은 《을사5조약》과 조선일본《합병조약》 등 구조약의 《적법성》과 《유효성》을 운운하면서 죄악에 찬 식민지통치를 《합법적》이며 《유효》한것으로 묘사하였으며 이에 따라 과거사죄와 보상문제란 있을수 없다고 하면서 오히려 제 편에서 남조선에 있는 《일본재산》을 청구할 《권리》가 있다고 하는 철면피한 궤변까지 늘어놓았다.
1953년 10월 제3차 본회담때 일본수석대표 구보다는 지어 《일본이 그때 조선에 진출하지 않았더라면 중국이던가 로씨야에 점령되여 있었을것이다.그리고 일본에 의한 점령보다 훨씬 비참한 경험을 했을것이다》라는 어처구니없는 폭언을 줴쳤다.이른바 이 《구보다망언》으로 하여 《회담》은 5년동안 중단되였다.
이에 바빠맞은 미제는 일본과 남조선에 뻔질나게 오가면서 당국자들에게 파탄된 《회담》을 시급히 재개하고 결속할것을 지시하였다.
1964년 가을 남조선주재 미국대사였던 브라운은 남조선당국자들과 여러차례밀담을 벌리고 《본회담》의 재개를 재촉하는 한편 매국회담을 반대하는 야당 및 지식인들에 대한 빈번한 《설득》공작을 벌리였으며 이전 쏘련주재 미국대사였던 케난은 정세가 계속 악화된다면 《미국은 부득불 미국에 더 중요한 일본우선정책을 밀고나가야 할것》이라고 위협하였다.
미국무성 차관보 번디는 1964년 9월 도꾜에 기여들어 일본외무성 차관에게 미국이 《힘껏 원조를 줄것》이니 《반드시 량국간의 관계정상화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하면서 《조기타결》을 촉구했으며 미국대통령 죤슨은 1965년 1월 12일 일본수상 사또를 미국에 호출하여 남조선에 대한 일본의 《권리》보장 등을 약속하면서 회담을 시급히 결속지을데 대한 지령을 주었다.
그리하여 14년동안이나 끌어오던 《본회담》은 7차로써 결속되고 1965년 6월 22일에는 남조선일본《기본조약》을 비롯한 29건의 매국문건들이 조인되였다.
일본의 성근한 사죄와 충분한 보상도 받아내지 못한채 체결된 이 범죄적인 《조약》과 《협정》들은 조선침략을 위한 미일공모결탁의 또하나의 산물이였으며 일본군국주의자들에게 재침의 길을 열어준 철두철미 침략적이며 예속적인 《제2의 을사조약》이였다.
범죄적인 남조선일본《회담》과 《조약》의 체결을 계기로 일본군국주의자들의 조선재침책동은 본격적인 단계에 들어섰다.
1963년에 조선침략을 가상한 《세개 화살작전》계획을,1964년에는 《날아가는 룡작전》계획을,1966년에는 《달리는 황소작전》계획을 작성하여 언제든지 조선을 무력으로 침공할 준비를 갖추어놓은 일본반동들의 책동은 파렴치한 독도강탈음모에서 더욱 로골적으로 표면화되였다.
1905년 2월 비법적인 《시마네현고시》라는것을 조작하여 독도를 강탈하려던 일본은 《까히라선언》과 《포츠담선언》 및 1946년 1월 29일 련합국 최고사령부 지령 제677호에 의하여 독도가 《폭력과 탐욕에 의하여 략취된 섬》으로 간주되여 조선의 합법적인 령토로 귀속되게 되자 미국을 등에 업고 독도를 빼앗기 위한 막후책동을 집요하게 벌리였다.
일본의 간청을 받은 맥아더사령부 외교국장이며 일본정부의 정치고문이였던 시볼트는 본국정부에 《일본의 주장은 정당한것》이며 《이 섬에 기상관측소와 레이다기지를 설치하는것이 안보상 고려되여야 한다》는 《건의》를 하였으며 그의 제기에 따라 미국정부는 원래의 《쌘프랜씨스코강화조약》초안을 고쳐 독도를 일본령토에 포함시키려고 책동하였다.
영국,오스트랄리아 등 나라들의 항의에 의하여 독도귀속문제는 이 조약에서 삭제되고 따라서 본래의 련합국 최고사령부 지령 제677호가 의연 효력을 가지게 되였으나 철면피한 일본반동들은 마치도 독도《령유권》문제가 《분쟁문제》인듯이 떠들면서 저들에게 필요하다고 인정될 때마다 그것을 주패장처럼 들고나오고있다.
더우기 엄중한것은 미국이 여기에 장단을 맞추고있는것이다.
우리 민족과 더불어 세계의 많은 나라들이 일본의 독도침략야망에 대하여 규탄의 목소리를 높이고있지만 유독 미국만은 《중립적립장》을 표방하면서 뒤에서는 은근히 일본의 독도강탈책동을 비호해주고있으며 미국출판물들에서는 독도를 《다께시마》로 표기하고있다.
이 모든 사실은 미일공모가 현 단계에서 일본군국주의의 령토팽창야망실현을 보장하는데로 지향되고있다는것을 실증해주고있다.
특히 랭전종식후 1990년대에 와서 미제와 일본반동들은 우리의 《핵의혹》과 《미싸일위협》을 날조하고 자주적평화통일의 길을 가로막으면서 광란적인 반공화국소동을 악랄하게 벌리였다.
미국과 일본은 《핵문제》를 구실로 조선반도정세를 극도로 긴장시켰다.
미국은 《작전계획 5027》,《작전계획 5027-98》,《작전계획 5030》,《작전계획 5029-05》등 각종 북침전쟁각본을 짜놓고 남조선에 최신전쟁장비들을 대대적으로 끌어들이는 한편 전쟁연습에 더욱 미쳐날뛰면서 우리 공화국을 기습타격하기 위한 공중정탐행위와 군사적충돌사건을 빈번히 꾸미였다.
지어 올해 1월에는 우리 나라를 《폭정의 전초기지》로 규정하고 무력에 의한 《제도전복》기도까지 드러내놓았다.
미제의 대조선적대시정책에 적극 공조해온 일본반동들은 《조일평양선언》을 휴지장으로 만들고 《유사시법》까지 조작하여 해외침략에 적극 나서고있으며 최근에는 《핵,미싸일문제》에 《랍치문제》까지 꺼들여 6자회담에 훼방을 놓으면서 미제와 함께 반공화국고립압살책동에 미쳐날뛰고있다.
일본방위청 장관 이시바는 2003년 3월 30일 《북조선의 발사장소에 대한 선제공격에 나서는것은 위헌이 아니다》라고 폭언한데 이어 4월에는 국회에서 《미국이 북조선을 선제공격하면 <자위대>가 군사적대응을 할수도 있다》고 떠들어댔다.
악의에 차서 우리 나라를 《북선》이라고 하면서 《북조선은 붕괴되여야 한다》느니,《북조선과 당당히 전쟁을 해도 좋다》느니 하는 폭언을 늘어놓은 도꾜도 지사 이시하라는 2003년 3월 미국신문 《워싱톤 포스트》와의 회견에서 《랍치문제》와 관련하여 우리를 《복수하여야 한다》고 하였는가 하면 자기가 《수상이라면 북조선과 전쟁을 시작》할것이라고 하면서 반공화국광기를 부리였다.(미국신문 《워싱톤 포스트》 2003년 3월 30일)
이상에서 보는바와 같이 근대이후 특히 《타프트-가쯔라협정》이 체결된 이후 미일공모결탁에 의한 100년간의 조선침략사는 우리 나라에 대한 미제침략자들과 일본군국주의자들의 침략야망과 책동이 시간의 흐름과 함께 더욱 강화되고있으며 미일침략자들이야말로 력사적으로 우리 인민에게 온갖 불행과 고통을 들씌운 백년숙적이라는것을 똑똑히 보여주고있다.
우리는 우리 민족에게 고통과 불행만을 강요한 미제와 일본군국주의자들의 죄악에 찬 침략의 력사를 한시도 잊지 않을것이며 온 민족의 단합된 힘으로 철천지원쑤들을 천백배로 복수하고 겨레의 숙원인 조국의 자주적통일을 기어이 실현하고야 말것이다.
주체94(2005)년 7월 28일

평양(끝)

Image credit: https://www.flickr.com/photos/taver/15114074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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