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

로동신문 회상실기 《백두산시절의 그 모습으로》

(평양 7월 15일발 조선중앙통신)15일부 《로동신문》에는 《백두산시절의 그 모습으로》라는 제목으로 된 개인필명(김열걸)의 회상실기가 옹근 한면에 실렸다.

그 전문은 다음과 같다.
나이 80고개에 이르러 지나온 인생길을 뒤돌아보느라면 제일 소중하고 보람찼던 시절이 20살안팎때였습니다.
그 나이때 저는 조국에 개선하신 위대한 수령님을 호위하는 경위대의 지휘성원으로 임명되여 2년나마 수령님을 모시고 일하였습니다.
위대한 수령님을 늘 몸가까이에서 뵈오면서 그이의 위인적풍모에 끝없이 매혹되였던 그 나날들을 돌이켜보면 저의 가슴속에서는 절로 만고의 빨찌산이 누구인가를 절세의 애국자가 누구인가를 아 그 이름도 그리운 우리의 장군 아 그 이름도 빛나는 김일성장군이라는 《김일성장군의 노래》구절들이 울려나오군 합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해방된 조국에 개선하시여서도 빨찌산장군의 그 정신과 기질,풍모로 새 조국건설사업을 령도하시며 백두산시절에 사시였습니다.
저는 그 시절에 보고 체험한 많고많은 사실들가운데서 일부만을 이 글에 담아보려고 합니다.

해방직후 나라의 정세는 이루 말할수없이 복잡하였습니다.
미군이 남조선을 강점하고 쏘련군대가 북조선에 진주한 가운데 국내와 해외에서 모여온 제노라고 하는 인물들이 저마끔 《애국자》,《혁명가》로 자처하면서 각양각색의 주의주장들을 들고나와 대중을 자기 편에 끌려 하였고 반동들과 종파분자들은 불순한 목적을 추구하여 별의별짓을 다하며 몹시 갈겨대고있었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새 조국건설로선을 관철하는 사업은 반혁명의 준동과 도전을 제압하는 치렬한 투쟁을 동반하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백두산에서 싸우시던 그 담력과 기상으로 이 운명적인 투쟁을 진두에서 이끄시였습니다.
아마 어떤 사람들은 위대한 수령님께서 해방된 조국에 돌아오시여서도 몸소 총을 들고 달려드는 원쑤들과 싸우시며 총격전을 지휘하시였다고 하면 설마하고 생각할수 있을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당을 창건하고 조국개선연설을 하신 후부터 수령님께서는 남산재기슭의 저택에 거처를 정하고 집무를 보시였습니다.
1945년 11월 10일경 어느날 늦은 저녁이였습니다.
제가 경위소대장으로서 보초소들을 돌아보고있는데 갑자기 정문보초소에서 자동총련발사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정문보초소에 달려가 알아보니 보초병은 정체모를 녀자 2명이 접근하며 수상하게 놀다가 서라는데도 응하지 않고 달아나기에 쏘았다는것이였습니다.
이럴 때 동쪽초소에서도 어지럽게 총성이 들리고 총알이 댁에까지 날아들어왔습니다.
저는 가슴이 섬찍하여 급히 위대한 수령님께로 달려들어가 정황을 보고드렸습니다. 보고를 받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조금도 당황함이 없이 기관단총을 가져오라고 하시더니 그것을 받아들고 현관으로 나가시였습니다.
현관앞에서 얼마쯤 떨어진 곳까지 나가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자신께서 여기서 전투를 지휘하겠다고 하시며 주도일,김명준동지들과 저에게 정문과 북쪽방향에 쌍보초를 세우고 경계를 강화하게 하라고 명령하시였습니다.
제가 경계를 강화하기 위한 대책을 강구하고 되돌아오니 수령님께서는 김책동지와 함께 동쪽초소로 달려드는 적들에게 한창 대응사격을 하고계시였습니다. 우리들은 수령님의 신변이 걱정되여, 더구나 그이께서 어둠속에서도 쉽게 눈에 보이는 흰 샤쯔를 입고계시는것이 마음에 걸려 어서 안전한 곳으로 옮겨가시자고 간절히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수령님께서는 나에게는 총알이 피해달아나, 맞지 않아라고 하시며 더욱 으스러지게 총을 틀어잡고 놈들에게 련발사격을 퍼부으시였습니다.
항일전의 나날 적탄이 비발치는 전장에서 몸소 기관총을 틀어쥐고 치렬한 화력전을 지휘하시던 호랑이기상 그대로이신 백두령장의 거룩한 모습을 우러르며 우리 경위대원들은 가슴속에 백두산악이 꽉 들어차앉는듯 배심이 든든해지고 더욱 용기백배해졌습니다. 우리들은 수령님의 지휘에 따라 맨 앞줄은 땅에 엎드려서, 다음줄은 무릎을 세우고 앉아서, 그 다음줄은 서서 가차없이 적들에게 몰사격을 들이댔습니다.
결국 혁명의 수뇌부를 노리고 덤벼들었던 무장악당들은 호된 불벼락에 시체만 너저분하게 남기고 한놈도 저택구역에서 살아나가지 못하였습니다. 저택을 습격해왔던 놈들은 일본패잔장교놈들과 그 주구들 수십명이였습니다.
해방직후 혼란된 정국을 수습하는데서 장애로 된것은 나쁜놈들의 준동만이 아니라 적지 않은 사람들이 정치사상적으로 각성되지 못하고있는것이였습니다.
각계각층 광범한 군중의 건국열의는 높았지만 일부 군중은 일제때부터 악선전을 들어온데다가 적대불순세력의 모략기만책동에 넘어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동요하고있었으며 지어 어떤 사람들은 반동들이 사촉하는 소요에 가담해나서기까지 하였습니다.
일부 로동자들이 식량과 로임을 내라고 소동을 벌렸던 평양철도공장사건이나 그와 류사한 함흥철도공장사건,분별을 잃은 청년학생들이 공산당 도당부와 도인민위원회를 습격하는 란동까지 부렸던 신의주학생사건 등이 다 그렇게 일어난것이였습니다.
이 사건들이 일어났을 때 위대한 수령님께서 한몸을 돌보지 않고 몸소 현지에 나가 사태를 수습하신데 대해서는 이미 대체로 알려져있으므로 저는 여기서 다만 신의주학생사건때 격정속에 목격체험했던 사실들에 대해서만 간단히 상기하려고 합니다.
1945년 11월 26일 평안남도민주청년단체결성대회를 지도하시던 도중에 신의주에서 발생한 불상사에 대한 보고를 받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자신께서 지체없이 신의주로 내려갈것을 결심하시였습니다.
일군들과 경위대원들이 위험한 곳에 절대로 가실수 없다고 막아나서자 수령님께서는 이 위기는 내가 가야만 타개할수 있다고 만류하는 사람들을 설복하시였습니다. 그러시고 당시 문수비행장으로 나가시여 오후 2시경에 군용비행기를 타고 신의주로 향하시였습니다. 주도일부관과 저는 어쩌는수없이 자동차를 타고 인차 그이를 뒤따라갔습니다.
이튿날 오후 소요가 일어났던 신의주동중학교 운동장에서 위대한 수령님을 주석단에 모시고 열린 군중대회는 예상했던것처럼 순조롭게만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사회민주당 대표와 고려민주당 대표의 연설에 이어 연단에 나섰던 공산당대표는 군중속에 섞여있던 반동들과 불순분자들이 악의에 찬 고함을 지르며 소란을 피우는바람에 말 한마디 못하고 몰려내려왔고 뒤이어 연단에 나섰던 다른 공산당대표 역시 같은 꼴이 되였습니다. 주석단가까이에서 이런 살벌한 광경을 지켜보면서 저는 당장 무슨 일이 터질것 같아 가슴을 조였습니다.
이러한 때 위대한 수령님께서 태연하게 연단에 나서시였습니다.
이제부터 영명하신 김일성장군님께서 연설하시겠다고 사회자가 소개하자 대회장에서는 《만세》의 함성과 함께 우렁찬 박수가 터져오르고 살기가 드리웠던 운동장은 화기로 술렁이기 시작하였습니다.
만장의 기대어린 시선이 쏠리는 가운데 찌렁찌렁한 음성으로 《동포여러분! 저는 김일성입니다.》라고 허두를 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반동들에게 놀아나는 군중을 깨우쳐주시기 위해 《해방된 조선은 어느 길로 나갈것인가》라는 력사적인 연설을 하시였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연설에서 먼저 해방된 조선은 우리 인민에게 자유와 행복을 가져다줄 민주주의적자주독립국가건설의 길로 나가야 한다고 명시하신 다음 이번에 신의주와 룡암포에서 일어난 사건은 전적으로 친일파,민족반역자를 비롯한 반동분자들의 책동으로 말미암아 일어난것이라고, 반동분자들은 사회질서가 서지 못하고 우리 인민이 난관을 겪고있는것을 기화로 하여 그리고 공산당이나 정권기관에 잠입한 일부 나쁜놈들이 인민의 리익을 침범하는 행동을 한것을 악용하여 학생들에게 소동을 일으키도록 충동하였으며 사태를 폭력행위에까지 끌어갔다고 까밝히시고 이번 사건에서 군중에게 소동을 일으키도록 선동한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다 민족반역자로 보아야 하며 그런자들은 응당 인민의 준엄한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 언명하시였습니다.
그이의 추상같은 말씀에 방금전까지 리성을 잃고 헤덤비던 불순분자들은 기가 죽어 쥐구멍이라도 찾을듯 했고 수만군중이 들어찬 대회장에는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정숙이 깃들었습니다.
이윽하여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공산당이 나쁘다고 하는것은 잘못된 생각이라고 하시면서 공산당은 로동자,농민을 비롯한 근로인민의 리익을 위하여 투쟁하는 가장 진보적이며 혁명적인 정당이라고 말씀하시고 공산당의 로선과 정책에 대해 명료하게 해설해주시였습니다.
더우기 연단가까이에 있던 군중속의 한 학생이 갑자기 당돌하게 장군님도 공산주의자이십니까라고 물은데 대해 주저없이 나도 공산주의자입니다, 나는 어떤 다른 나라를 쳐다보는 공산주의자인것이 아니라 우리 인민에게 의거하고 조선민족과 조선인민을 위하여 싸우는 공산주의자입니다라고 하시며 주신 그이의 명쾌하고도 가슴후련한 대답은 청중들의 심장을 완전히 틀어잡고 공산당에 대한 오해와 의혹을 품고있던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가짜와 진짜를 똑바로 식별하고 얼어붙었던 마음과 마음을 뜨거운 애국의 열기로 녹아내리게 하였습니다. 대회장에서는 열광적인 환호성이 터져올랐습니다.
항일전의 나날 비상한 용단과 감화력으로 편견과 몰리해에 쩌들어있던 사람들까지 혁명의 편에 끌어당기시였던 우리 수령님이 아니고서야 누가 이렇게 단 한번의 연설로 민심동향을 극적으로 전환시킬수 있었겠습니까.
위대한 수령님께서 이렇게 한몸의 위험도 마다하지 않고 사건현장들에 나가 항일유격대식으로 군중정치공작을 벌리시였기에 혼란된 정국은 점차 수습되고 각계각층 인민들은 진보적민주주의기발아래 뭉쳐 새 조국건설에 더 힘있게 떨쳐나서게 되였습니다. 이에 겁을 먹은 악질반동들이 건국의 흐름을 역전시켜보려고 혁명의 수뇌부를 겨냥하여 갖은 비렬한 책동을 다했지만 수령님께서는 그런것쯤에는 백두산처럼 끄떡도 하지 않으시였습니다.
1946년 1월 5일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인민극장(오늘의 국립연극극장)에서 《모스크바3국외상회의 결과와 조선인민이 할일》이라는 강연을 하시였습니다.
그런데 수령님께서 청중들의 마음을 틀어잡으시며 한창 강연을 하시는 도중에 2층에 숨어있던 반동놈들이 혼잡을 일으키려고 이상한 소리를 내며 웅성거렸습니다. 이놈들은 우리가 김정숙동지의 가르치심에 따라 참가증을 확인하면서 출입을 단속했는데도 일시 질서가 문란해진 틈을 타서 새여들어온 몇몇 반동놈들이였습니다.
저는 강상호동지가 눈짓하는대로 즉시 2층으로 달려올라갔습니다. 그러자 바빠난 반동놈들이 뛰여내려가면서 뒤쫓아가는 저를 향해 총을 쏘았습니다. 저는 다리에 부상을 입고 쓰러졌습니다.
그 시각 예상치 않았던 총소리에 장내는 커다란 불안과 위구에 휩싸였고 주석단에 앉아있던 일부 사람들은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어디론가 피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수령님께서는 총소리를 전혀 못들으신듯 연탁에서 안색 하나 달리하지 않으시고 더욱 열정에 넘쳐 강연을 계속하시였습니다.
천지가 진동해도 눈섭 하나 까딱하지 않으실 그이의 담대무쌍하고 배포유한 모습을 우러르며 사람들은 경탄을 금치 못하였고 장내에서는 폭풍같은 박수갈채가 일어번지였습니다.
그날 백두산호위장군 김정숙동지께서는 우리 경위대원들이 지켜야 할 초소까지 먼저 맡아나서시여 다른 호위일군과 함께 1층 뒤문으로 빠지려는 반동놈을 꼼짝못하게 사로잡으시였습니다.
위대한 수령님을 모시고 평양역전광장에서 성대히 거행된 3.1운동 27주년 평안남도경축대회에서 군중시위가 시작되였을 때 미제와 남조선반동들이 파견한 살인테로단놈들이 작당하여 던진 수류탄 한개가 주석단에 날아와 떨어졌고 이 위기일발의 순간 주석단뒤에 서있던 쏘련군 군관 노비첸꼬가 비호같이 몸을 날려 당장 터지려는 수류탄을 오른손에 거머쥐고 달려가 엎드려 폭파시킨 사실은 이미 널리 소개되였습니다.
저는 그 직후에 체험했던 사실들을 여기에 더 적으려고 합니다.
뜻하지 않은 폭음에 군중들의 시선은 위대한 수령님께서 계시는 주석단으로 쏠리였으며 시위대렬속에서는 혼란이 일어나려 하였습니다. 일부 주석단성원들은 황급히 자리를 피했습니다.
우리 호위성원들은 다급히 주석단으로 달려올라가 수령님께 근심어린 초조한 눈길을 보냈습니다.
그러자 수령님께서는 《일없소. 우리야 백두산에서 싸우던 사람들이 아니요. 놀랄것은 없소.》라고 하시며 아무런 일도 없었던듯 그 자리에 서서 군중들에게 손저어 격려를 보내시였습니다.
그러시는 위대한 수령님을 우러르는 시위군중속에서는 《김일성장군 만세!》,《반동분자들을 타도하자!》 등 구호들이 연방 터져나왔으며 광장은 터진 활화산과 같은 열정과 기세로 끓어번지였습니다.
갱안전모자를 쓰고 괭이를 멘 사동탄광 로동자들이 소리높이 《만세》를 웨치며 주석단앞을 씩씩하게 지나가는것을 보신 수령님께서는 일군들에게 《보시오. 우리는 혼자가 아니요. 저렇게 믿음직한 로동계급을 우리 당이 가지고있는 이상 우리는 토지혁명을 기어이 해낼것이며 농민대중을 전취하고야말것이요.》라고 말씀하시였습니다.그리고 시위행렬이 다 지나간 뒤에는 차를 타고 그들을 따라가시다가 기림리 가까이에서 내려 삼신탄광,강동탄광 로동자들에게 원쑤들이 질겁하도록 더욱 기운차게 발맞추어 행진하자고 손을 흔드시며 격조높이 호소하시고 몸소 시위대렬의 맨 앞줄가운데 들어서시여 로동자들과 어깨겯고 가루개고개우까지 발걸음을 맞춰나가시였습니다.
그 광경을 보는 군중들의 사기와 열기는 더욱 하늘을 찌를듯 하였습니다.
원쑤들은 우리 혁명의 수뇌부를 해치고 새 조국건설의 도도한 흐름을 막아보려고 천인공노할짓을 감행하였지만 그것은 오히려 위대한 수령님에 대한 인민들의 절대적인 지지와 신뢰의 정을 더욱 높여주고 그이의 건국로선을 따라 새 조국을 건설하려는 인민의 신념과 의지를 더 굳게 하였을뿐입니다.
제가 알고있건대 제2차 세계대전후 파쑈도이췰란드의 기반에서 해방된 동유럽나라들은 대체로 2~3년동안이나 혼란과 곡절을 겪다가 다른 나라가 개입해서야 정국을 수습하고 새 사회건설의 길에 들어섰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는 안팎의 정치정세와 정치세력관계가 그처럼 복잡한 가운데서도 혼란된 정국을 단시일내에 바로잡고 주체적력량에 의거하여 새 조국건설위업을 다그쳐나가게 되였습니다.
저는 생각해봅니다. 만일 백두산장군, 장군형의 정치가가 아니고 책상물림의 양복쟁이, 계몽활동이나 지하투쟁밖에 해보지 못한 사람이 정치의 키를 잡았더라면 이런 경이적인 전변이 이룩될수 있었겠는가. 어림도 없었을것입니다.
오직 백두산 줄기줄기, 압록강 굽이굽이 피어린 자욱을 새기시며 강도 일제를 족치시고 조국해방을 안아오신 빨찌산장군, 쌓으신 업적으로 하여 누구도 견줄수 없는 권위를 지니시고 비범한 예지와 통찰력으로 가장 옳바른 건국로선과 방략을 제시하시였을뿐아니라 백두의 혁명정신과 담력,기상으로 온갖 난국을 타개하신 위대한 수령님의 탁월한 령도가 있음으로 하여 역경이 순경으로 전환되고 우리 인민은 좌로도 우로도 탈선하지 않고 새 조국건설의 길을 곧바로 성과적으로 개척해나갈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조선의 운명을 또 한차례의 위기에서 구원하신 우리 수령님의 불멸의 공적이였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해방된 조국에 돌아와 새 조국건설사업을 령도하시며 백두산에서 싸우실 때와 다름없이 몹시 분망한 헌신과 로고의 나날을 보내시였습니다.
위대한 수령님의 회고록에 《우리의 조국개선은 개선이라기보다 혁명의 새 장을 개척하기 위한 전략적이동과 같은것이였다고 말할수 있습니다.》라고 씌여있는것처럼 그이께 있어서 부강한 자주독립국가건설은 조국해방에 이어 반드시 점령해야 할 전략적목표였고 해방된 조국땅은 새로운 빨찌산전구였습니다.
그러기에 조국에 개선하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이 해방열에 들떠 희희락락하고있을 때 조국과 인민앞에 지닌 사명감을 새롭게 가다듬으시며 모든 락과 휴식을 뒤로 미루시고 밀영의 등잔불앞에서 새날을 맞으시던 빨찌산일과대로 사업하고 생활하시였습니다.
우리 경위대원들이 보초를 서면서 보면 수령님께서 계시는 방에는 매일 밤 1시,2시가 되여서야 불이 꺼졌다가 새벽 5시면 꼭꼭 켜지군 하였습니다.
그것이 너무 신기할 정도로 규칙적이여서 제가 한번은 새벽에 정원을 거니시는 수령님께 어려움도 잊고 어떻게 되여 그렇게 늦게 주무시고 일찍 일어나시는가고 물은적이 있습니다.
저의 그 물음에 수령님께서는 웃으시며 산에서 싸울 때 붙은 습관이여서 이제는 굳어진 일과로 되였다고 하시였습니다.
그 말씀에 저는 숭엄한 감정에 젖어들어 더 아뢰일 말을 찾지 못하였습니다. 조국은 해방되였지만 무수한 난관과 시련이 앞을 막아나서는 어렵고 생소한 건국의 초행길을 다름아닌 자신께서 책임지고 헤쳐나가야 한다는 마음의 자명종을 스스로 울려가며 산에서 싸우실 때와 같이 하루일과를 시작하시는 그이의 고결한 정신세계가 가슴에 뜨겁게 미쳐와서였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빈틈없이 째여있는 일과에 따라 분초를 아껴가며 오직 사업에만 온 정력을 쏟아부으시였습니다.
1945년 11월초 어느날 오전에 있은 일입니다.
만경대의 김형록삼촌께서 재령에서 올라온 먼 친척들을 데리고 저택에 찾아와 들여보내달라기에 저는 삼촌을 봐서 그냥 통과시켰습니다.
그런데 얼마후 그들을 돌려보내신 수령님께서는 강상호,주도일동지들과 함께 저를 부르시더니 신중한 안색을 지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시였습니다.
이 집은 나라와 인민이 나에게 일을 하라고 준 집입니다.편안히 보내라고 준 집은 아닙니다. 내가 일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제부터 만경대삼촌이나 칠골외삼촌이외에는 나의 승인없이 그 누구도 들여보내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그이의 준절한 말씀을 들으면서 저는 자책감으로 고개를 들수 없었습니다.
새 조국건설과업이 너무도 중하고 미룰수 없으시여 긴긴 세월 한시도 잊으신적 없던 만경대조부모님들과의 상봉도 뒤로 미루시고 강선로동계급부터 찾으시는 수령님의 숭고한 모습을 직접 뵈왔었고 그이께서 순간의 휴식도 없이 집무에 몰두하시는것을 매일,매 시각 보면서도 저택출입질서를 어겨 그이의 귀중한 시간을 축내게 하였으니 왜 안그렇겠습니까. 저는 건국사업과 관련한 고견을 듣고저 찾아오는 사람들은 흔쾌히 만나주시면서도 친척들을 만나시는것은 그처럼 절제하시는 그이의 풍모에서 언제나 자신의 일보다 혁명사업을, 일가친척보다 인민들을 먼저 생각하시는 높은 뜻을 더욱 가슴깊이 감득하였습니다.
백두산시절처럼 불면불휴하시는 위대한 수령님의 《빨찌산일과》는 현지지도의 길에서도 그대로 이어졌습니다.
백두산에서 매고온 신들메를 풀 사이도 없이 평양에 도착하신 이틀후에 벌써 북조선전기총국과 평양곡산공장을 현지지도하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당창건을 위한 예비회의를 앞두고 여러가지 중요한 사업으로 더없이 바쁘신 가운데서도 10월 2일 평천리에 있는 이전의 병기공장을 돌아보신데 이어 다음날들에는 서포에 있던 일본군의 식량창고,피복창고, 요새화된 비밀작전참모실과 간리에 있던 병기고 그리고 룡성에 있던 연유창을 련일 찾으시였습니다. 군사와 관련한 대상물이라면 비록 마사지고 내버려진것이라 하여도 먼저 찾아 구체적으로 료해하시며 앞으로 개건하여 무엇을 생산하고 쏘련군측으로부터 넘겨받아 어떻게 유용하게 쓸것인가에 대해 가르쳐주시는 수령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저는 그이께서 국방과 군건설을 얼마나 중시하고 우선시하시는가를 직감할수 있었습니다. 해방후에도 백두산장군의 선군의지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위대한 수령님의 현지지도는 유격대가 인민을 떠나서는 살수 없다는 지론대로 인민들속에 깊이 들어가 그들과 허물없이 어울리시며 혼연일체가 되고 그들의 념원과 요구를 헤아려 해결책을 세워주시는 과정이기도 하였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토지개혁을 전후하여 평안남도지구의 농촌들에만도 수십차례나 나가보시였는데 그 나날들에 차를 타고 지나가시다가 탈곡장이나 밭머리,길가에 나와있는 농민들에게로 다가가 담화하기도 하시고 큰 기와집을 마다하고 굳이 볼품없는 초가집을 찾아가 꿰진 노전우에서 집주인과 무릎을 마주하고 토지개혁실행방도를 의논하기도 하시였습니다.
제가 그 나날에 위대한 수령님을 모시고 목격체험했던 감동적인 사실들을 다 적자면 아마 장문의 글을 따로 써야 할것입니다.
그가운데는 오늘의 증산군 함종리에 나가 류숙하시고 이튿날 습관대로 새벽 5시에 일어나 주변야산에 오르시였다가 내려와 아침식사를 하시자마자 물문제를 풀어주시려 린근에 있는 저수지로 가 지형조건을 타산해보시고 저수지를 확장할데 대한 가르치심을 주신 사실도 있고 오늘의 삼석구역 성문땅을 찾으시여 오래동안 지주집머슴살이를 해온 박장반농민에게 이전날 지주가 가지고있던 큰 기와집에서 살도록 해주시고 손수 문패까지 크게 써서 대문기둥에 달아주시였으며 가파로운 오솔길을 따라 골짜기로 오르시여 가장 맞춤한 저수지자리를 잡아주신 전설같은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것은 정녕 항일의 나날부터 《인민행렬차》를 타고 이민위천을 좌우명으로 삼아오신 우리 수령님의 인민적풍모가 펼친 력사가 처음 보는 사랑과 헌신의 화폭이였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지방현지지도의 길에서 산과 들을 주름잡으시며 항일의 전장들을 종횡무진하시던 그 모습대로 그야말로 경탄하지 않을수 없는 맹활약을 하시였습니다.
하루에도 몇개 단위씩 찾으시고 가시는 곳마다에서 각급 일군들과 각계각층 인민들을 만나시고 회의도 지도하시고 연설도 하시면서 어찌나 정열적으로 바삐 긴장하게 하루하루의 일정을 보내시는지 우리 경위대원들도 미처 따라다니기 힘들 정도였습니다.
력사적인 첫 민주선거를 앞두고 평안북도를 현지지도하시면서 위대한 수령님께서 당창건 1돐이 되는 10월 10일, 이 하루를 삭주에서 어떻게 보내시였는가에 대해서만 간추려 회상하려고 합니다.
새날이 밝기전에 일어나시여 려관정원의 호수가를 산책하시며 이곳에 근로자들을 위한 훌륭한 휴양소를 꾸리실것을 구상, 이어 독서를 하시고 소박한 아침식사를 하신 다음 군인민위원회에 가시여 군일군들과 담화,곧 당시 삭주인민학교 운동장으로 가시여 삭주군군중대회 참가자들앞에서 《민주조선건설의 토대를 튼튼히 다지자》라는 력사적인 연설, 주석단에서 내리시는 길로 수풍으로 가시여 낮 12시부터 오후 2시가 넘도록 수풍발전소현지지도, 끝나자마자 당시 수풍인민학교 운동장에서 2시간나마 진행된 수풍면군중대회에 참석하시여 연설, 오후 5시가 지나서야 점심식사를 하시면서 일군들을 고무, 잠시의 휴식도 없이 다시 삭주려관에 가시여 《민주조선》 기자가 제기한 여러가지 질문에 대답을 주심, 그를 바래워주시고나서 자정이 가까와올 때까지 삭주군당,정권기관,사회단체 책임일군협의회에서 군사업을 개선하기 위한 과업 제시, 한밤중에 또다시 책상에 마주앉으시여 학습…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지칠줄 모르는 초인간적정력으로 가시는 곳마다에서 인민들을 새 조국건설에로 불러일으키시며 과업과 방도들을 밝혀주시였을뿐아니라 항일혁명투쟁시기부터 그려오신 인민들이 잘 사는 부강번영하는 조국을 현실로 앞당겨오실 새로운 구상을 펼치군 하시였습니다.
60여년세월이 흘렀지만 지금도 눈에 선하고 기억에 생생합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해방된 그해 가을 차를 타고 황해도 금천으로 들어가시다가 마을사람들이 우물가에서 김장배추를 먼저 씻겠다고 옥신각신하는것을 보시고 앞으로 매 가정들에 수도를 놔주어야겠다고 수원들에게 이르시던 일이며 그해 12월 26일 개원식을 앞둔 평양학원을 현지지도하시고 돌아오시다가 칠골에 있는 수수울타리를 치고 이영이 고삭은 강윤범동지의 초가집에 들려 식사하시면서 농촌에 문화주택들을 짓고 장생산을 공업화할데 대해 말씀하시고 뒤엉킨 잡관목사이로 나진 오솔길로 봉화산중턱까지 오르시여 보통강개수공사를 발기하시던 일, 1946년 3월 4일 오늘의 평양시제1인민병원을 돌아보시면서 입원실과 입원환자침대가 적어 환자들이 추운 날에도 야외에서 풍막을 치고 치료를 받고있고 의사와 간호원, 의료설비와 약품이 적어 환자치료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있는 실태를 직접 보고 료해하시며 당면한 대책들과 함께 앞으로 인민들이 돈때문에 병을 치료받지 못하는 일이 없게 하여야 한다는 무상치료제구상을 밝히시던 일…
이런 실례들은 얼마든지 들수 있을것입니다.
이렇게 모든것을 무심히 대하지 않고 거기에서 새라새로운 일거리들을 발견하여 자신의 어깨우에 짐으로 걸머지시며 새 조국건설에서 나서는 어렵고 복잡한 모든 과제들을 솔선 맡아안고 풀어나가시자니 수령님께서 어찌 쉬실수 있었겠습니까. 수령님의 그 로고는 누구도 대신할수 없는것이였으며 따라서 그이께서 바쁘신것은 어찌할수 없는 력사의 숙명이기도 하였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새 조국건설의 중하를 한몸에 걸머지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하시면서도 생활은 백두산시절처럼 검소하게 하시였습니다.
저는 지금도 1945년 12월 중순 어느날에 있었던 일을 잊지 않고있습니다.
그날 항일투사들은 북조선공산당 중앙조직위원회 제3차 확대집행위원회에 참가하기 위해 각 도에 파견되였던 투사들이 서로 오래간만에 만난 기회에 위대한 수령님을 한자리에 모시고 저녁식사를 하기로 토론하였습니다. 수령님을 몸가까이 모시고 일하는 부관들도 이 기회에 여느때보다 색다른 음식 몇가지를 더 준비하였습니다.
그날 저녁식사시간이 퍽 지나 저택에 들어오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음식을 차려놓은것을 보시고 오늘이 무슨 날이기에 이렇게 많은 음식을 차렸습니까. 이왕 차린 음식이니 듭시다. 마음껏 드시오라고 말씀하시였습니다.
평소에 그 어떤 특전도 특식도 허용하지 않으시던 수령님이시였지만 해방된 조국에 돌아오자마자 지방에 파견되여 수고를 많이 한 전사들에게 다소나마 즐거움을 주려고 마음껏 들라고 하시였을것입니다.
그렇지만 수령님께서는 식사가 끝나자 투사동지들을 둘러보시며 진중한 어조로 이렇게 말씀하시는것이였습니다.
매 사람에게는 국가가 정한 식량기준량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차린 음식은 기준량보다 많은것 같습니다.
동무들도 알겠지만 지금 나라의 식량사정이 곤난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산에서 싸울 때를 생각하면야 이런 일을 하겠습니까. 나라의 세간살이를 책임진 우리들이 생기면 먹고 없으면 손가락을 빠는 식으로 해서는 안됩니다. 물론 나를 위해서 한 일이라고 생각은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것이 결코 나를 위한것이 아닙니다. 동무들은 앞으로 식생활을 소박하게 하여야 합니다.
백두산에서 싸우던 때를 잊지 말고 언제나 인민들과 고락을 함께 하도록 일깨워주시며 자신께도 그런 요구성을 제기하시는 그 말씀에 투사동지들은 물론 우리들도 커다란 충격과 자책을 받았습니다.
1945년 12월초 어느날에는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그날 밤 강상호,리두익동지들과 함께 저는 평안남도당 경리부장 박정호동지의 집에서 위대한 수령님을 모시고 저녁식사를 하였습니다.
수령님께서는 식사하시던 도중에 강상호,박정호동지들로부터 함경북도에서 활동하시다 평양으로 오시는 김정숙동지를 맞이하기 위해 새 저택을 꾸린다는 말을 들으시고 지금 나라살림살이가 어려운 형편인데 자신께서 산에서 싸울 때 인민을 위한 빨찌산대장으로 산것처럼 해방된 오늘에는 인민의 지도자답게 검소하게 살도록 꾸려달라고 간곡히 당부하시며 가장집물을 어떻게 소박하게 장만해야 하겠는가에 대해서까지 일일이 말씀하시였습니다.
이렇게 꾸려진 해방산기슭의 단층집이 후날 남조선에서 왔던 려운형선생을 비롯하여 각계 인사들이 와보고 일국의 수령의 집으로서는 밖이나 안이나 너무도 검소하다고 탄복해마지 않았던 그 저택이였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해방직후에 이어 그후에도 백두산시절의 자세와 모습으로 혁명과 건설을 령도하시며 한생을 줄달음쳐 살아오시였습니다.
전쟁시기와 전후복구건설시기는 물론 년세가 높으시여서도 남먼저 새벽을 맞이하시고 밤늦게까지 순간의 휴식도 없이 《빨찌산일과》대로 일하고 생활해오신분, 인민들에게 주실수 있는것은 다 주시고도 아직 주지 못한 유족한 생활과 조국통일을 안겨주시려 지팽이를 승용차에 감추고 다니시면서도 계속 헌신의 길을 이어오신분, 위대한 생애의 마지막시기까지 백두산시절처럼 전사들과 격차없이 생활하시며 스스로 무거운 짐을 계속 지고오시다가 겹쌓인 정신육체적과로로 집무실에서 순직하신분.
이런 위대한 혁명가,성인이시였기에 수령님을 사무치게 그리워하며 대를 이어 수령님의 유훈을 관철하려는 우리 인민의 마음 그처럼 절절하고 강렬한것이 아니겠습니까.
경애하는 김정일동지는 백두산의 아들로 탄생하시여 빨찌산 김대장께서 매여주신 행전을 치고 대를 이어 백두의 행군길을 걸어오시는 또 한분의 위대한 백두산장군,백두산형의 정치가이십니다.
혁명의 진두에 나서신 첫시기부터 이 나라의 첫새벽 창문을 여시고 밤의 마지막창문을 닫아오신 그이께서 오늘도 선군장정의 길에서 끊임없이 이어가시는 불면불휴의 선군혁명일과는 수령님께서 한생의 습벽으로 굳히셨던 《빨찌산일과》 그대로이며 온 나라를 빨찌산전구로 삼으시고 전선으로,공장과 농촌으로 종횡무진하시는 그이의 눈부신 대활약은 수령님의 빨찌산식활동방식 그대로입니다.
저는 또한 《쪽잠과 줴기밥》과 같은 눈물겨운 혁명일화들을 수놓아가시는 위대한 장군님의 모습에서 해방직후 백두산시절처럼 침식마저 잊으시고 조국과 혁명을 위해 헌신분투하시던 위대한 수령님의 모습을 그대로 보고있습니다.
대를 이어 장군형의 수령복을 누리고있는것은 우리 인민만이 받아안은 더없는 행운이고 영광입니다.
저는 위대한 백두의 선군령장을 모시여 우리 조국은 그 어떤 모진 광풍이 휘몰아쳐와도 백두산처럼 거연히 솟아있을것이며 위대한 수령님께서 한평생 바라시던대로 이 땅우에 통일되고 번영하는 강성대국이 반드시 일떠서리라고 굳게 믿습니다.
주체95(2006)년 7월(끝)

Image credit: https://www.flickr.com/photos/25061723@N00/6165118916/

Related posts: